#####시인의 공부방2

90년사 이정토권사

덕화2001 2007. 2. 27. 19:35
이 사람이 궁금하다!
-이 정토 권사-


그녀의 신앙생활의 첫걸음..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 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시편 127편>

 서울이나 지방에서 너른 고을 광주로 진입하다보면 시청과 보건소 사이 광주의 중심지에 정갈하게 터를 잡은「 광주교회」와  마주한다. 그리고 그 옆.. 본 교회의 커다란 날개 밑에 교회의 문지기처럼 자리한 집이 있다. 이 정토 권사의 집이다. 이 정토 권사는 광주 초대 권사인 최 연단 권사의 7남매 중 막내로 태어나 대가족 속에서 사랑과 은혜를 받으며 성장했다. 지금은 신앙인이 되었지만  한 때  올케가 무속인이었을 때는  더욱 하나님께 매달리는 일로 믿음을 고통 가운데서도 주님게 기도에 전념하는 청년이였다  그녀의 신앙생활은 지금 교회의 전신인 읍사무소 뒤의 초가지붕으로 된 아담한 교회 때부터 시작되었다. 1946년 해방, 그 이듬해부터 50여년간 신앙생활을 해온 그녀에겐 교회에 대한 은혜스러운 기억들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김병선 목사 재직시 교회를 신축하고 이 성봉 목사님이 오셔셔 부흥회를 할 때 단층인 교회의 모든 창문을 열어 놓고 부흥회를 했다. 교인들만의 부흥회로 끝나는 줄 알았지만 그것이 아니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지나가던 행인들이 삼삼 오오 모여 열린 문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인 것이다. 그녀는 그때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한다. “아! 이것이 하나님의 기적이구나.. 하나님은 존재 하시는구나” 하나님의 존재하심을 부흥회의 말씀을 듣고 체험한 것이다. 이에 신앙생활에 더욱 열정을 쏟은 이정토 권사는 청년회에서 신앙 봉사 활동하면서 반사로 활동했는데, 김옥년, 고숙제, 윤현구 반사들과 함께 일하면서 주일학교를 통해 많은 일들을 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맺어주신 인연. 김 봉희 장로를 만나 백년가약을 맺었다. 그 이후, 그녀의 신앙생활은 더욱 단단해졌다.


거침없는 하나님의 대한 사랑..
                       -지혜를 얻은 자와 명철을 얻은 자는 복이 있나니-  < 잠언 3장 >

  청년시절을 지나 중년으로 넘어서면서 그녀의 신앙생활은 더욱 왕성해지고 믿음은 더욱 돈독해졌다. 성결교단의 교리인 사중복음 (四重福音)의 중생. 성결. 신유. 재림으로 가정과 신앙 모두 소홀함 없이 일했다. 그 활동 면면을 들여다 보면 1973년 박동일 목사 시무시 광주교회 여전도 회장에 임명되어 여러 해를 역임하였으며 1979년에 다시 여전도 회장에 임명되었고 김 영재목사 시무시에는 1여전도회가 3 여전도회로 거듭 발전하게 되는 값진


                                    1



결과를 얻게 되었다. 지금은 14여전도회로 성장 하였으니 감회가 새롭다고 하겠다.  해를 거듭하면서 1982년 신 보현 목사 재임 시에는 경기 동 지방 여전도 회장에 선임되었으며 1990년 한 상윤 목사 시무 시에는 광주교회 총 여전도 회장에 임명되고, 권사취임 후 권사회장에 임명되는 등 그녀의 맹활약은 계속 되었다. 이렇게 그녀의 신앙생활의 깊이가 더 해진 것은 ‘사마리아 땅 끝까지 전도하라는 그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고자 노력하며 봉사했기 때문이리라.. 그녀는 주님의 발자취를 따르는 순종의 산 증인, 작은 거인이 되어갔다. 1983년 신 보현 목사 재직시 경기도 지방 여전도 회장을 여러 해 역임했고, 함영선 목사 시무 시 제일 지방 권사회장, 뒤이어 1996년 전국 권사회 회장으로 임명, 여성 안수위원회에 부위원장으로 활약해서 2004 98차 교단 총회에서 여성도 여장로 여목사로 지금 교단의 승인을 받는등.  그녀의 신앙 활동이 활발해 지면서 광주교회의 위상도 함께 커갔다. 그리고 마침내 2003년도에는 경기지방 여전도회 20년 근속공로패까지 받게 되었다. 전 생애를 광주교회의 발전과 더불어 같이 희로애락을 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신앙간증의 세월이였다. 그리고 여성안수위원회 명칭이 여장로추진위원회로 명칭이 바뀌며 하나님을 섬기는 사역자를 위해서 물질로도 마음으로도 헌신하였다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 요한 1서 4 장>

 이 정토 권사는 일생을 두고 새벽제단을 쌓으며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라는 말씀을 지키며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였다. 사람이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괭과리와 같고 모든 비밀과 지식을 알고도 또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씀을 마음에 간직하고 자그마한 체구에 온화한 미소를 띄우며 작은 사랑의 실천을 해 나갔다. 침술을 배운 그녀는 필리핀에서 초청하는 곳이면 어디든지 돌며 광주교회 김 상섭 권사, 김의수 집사, 최승열 집사와 함께 침술봉사를 하러 다녔다. 낯선 땅에서의 사랑의 실천이었다. 어느 교회 사모님이 옷이 없어 자신의 옷을 잘라 딸에게 옷을 해 입혔다는 얘기를 듣고 옷을 모으고, 모금해서 도운 일  모교회의 지붕을 고쳐준 일등 하나님의 손길이 필요한 곳이면 주저하지 않고 달려갔다.  여성안수 위원회 명칭이 여장로위원회로 명칭이 바뀌인 현재도 이사로 재직 중이다. 또한  하나님을 섬기는 사역자를 통해서 물질로 마음으로 헌신하였다.
이렇게 봉사활동을 하다보니 크고 작은 사건도 있었다. 집을 자주 비우니 봉사 나간 사이에 도둑을 맞기도 했고, 봉사활동 하러 가다 장마에 차가 미끄러져 동행한 이 기남 권사와 함께 교통사고를 당하던 일 등 많은 어려움도 뒤 따랐다. 늘 옆에서 그녀의 행보를 지켜보던



                                      2




김 경자 권사의 말을 빌리면 일생을 신명나는 마음으로 불우이웃을 돕는 그녀를 보면 참 그녀 가슴 속 안에 깃든 하나님의 뜻을 읽을 수 있었다고 했다. 1997년에는 전국여전도회 장학이사로 임명, 불우청소년을 음으로 양으로 도왔고, 1998년도에는 전국권사회 장학회 총무로 임명, 지금까지 재임 중이며 또한 상도복지관 운영회 서기로도 활동중이다. 여전도회를 출발삼아 이제는 점점 질적으로 양적으로 커가는 광주교회에서 내실을 기하기 위해 어머니로 구성된 에스더 합창단을 창단 재임 시 단복도 한복으로 교체하였는데, 여러 회원들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또한 광주교회 산악회를 조직하여 성도간의 돈독한 화합의 장으로 자리매김 하는데 밑거름이 되게 하였다.




성전을 짓겠다는 그녀의 굳은 각오..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빌립보서  1장 19절>

 무슨 일을 계획하면 뒤로 물러설 줄 모르는 진취적인 이 정토 권사는 젊어서 마음속에 고백하기를 주님의 참 된 교회를 짓겠다고 서언하였다고 한다. 그 맹서는 수 십년 후에 지켜졌다. 전국 권사회 회장시에 중국 요령성 신빙현에 신빙교회를 세운 것이다. 1996년에 시작하여 1998년에 완공하여 정기적인 예배 외에도 문서배포사역 및 순회전도사역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를 통해 개척사역도 이루어진다고 말했다. 덧붙여 제언하기를 요령성 한성이 한반도 보다 큰 땅이며 신빙교회는 이곳에서 사역을 담당하고 있는 바 한국교회는 이들과 동반자적인 협력사역을 위해 계속적인 기도와 관심이 필요하다고 역설하였다. 그 후, 소원한 일들이 이루어졌다고 생각하였는데, 그것은 전국 권사회를 통해 한일이기에 석연치 않아했고, 그는 또 남은 여생에 교회를 꼭 하나 더 세우고 싶다고 다짐했다. 지금은 부여 중앙교회에 있는 박정순 권사와 협력하여 미국 국경지역인 멕시코 티하나에 교회를 건축 중에 있다. 부흥하는 교회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신축중인 이 교회는 매주일 70여명이 예배드리고 있는데 재건축으로 인하여 근방에서 지역최고의 교회로 거듭날 것이며 곧 다가올 2005년도 봄이면 완공 될 것 이라고 했다.
그녀의 남은 생애의 소망을 이뤄가고 있는 것이다. 김 봉희 장로와의 사이에 1남 4녀를 두고 다복한 믿음의 가정을 꾸려온 이 정토 권사는 이 모든 나의 일은 하나님께서 주관하였고 또한 김 봉희 장로의 배려로 모든 일을 할 수 있었다고 겸손의 미덕을 보였다.
광주 교회의 2005년의 표어는 ꡒ사랑을 점점 더 풍성하게 하자ꡓ다. 또 우리의 기도 제목


                                      3




을 살펴보면 첫째, 하나님사랑, 이웃사랑, 세상사랑. 둘째, 오늘은 광주.. 내일은 세계를 위해 기도하기. 셋째, 주님의 훈련에 참여하여 예수님의 제자 되기. 네 번째, 심령부흥 수적부흥 교회학교 부흥. 다섯째, 나누고 섬기고 봉사이다. 오늘의 이 표어와 기도제목대로 실천한 이 정토 권사의 신앙생활의 발자취는 내일도  계속될 것이다. 신실한 믿음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언제나 주관이 뚜렷한 행동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으로 옮긴 이 정토 권사.. 제2 제3의 이 정토 권사의 모습을 닮은 많은 여전도 회원을 떠올려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