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이야기

맹사성일화와 동상례

덕화2001 2020. 6. 14. 13:26

고불 청백리 맹사성의 일화(逸話)

 

충남 아산에 있는 고불(古佛) 맹사성 (孟思誠·13601438)고택은 최영 장군이 살던 집으로 북향 명당집으로 유명하다. 10세 때 이사 왔으며 고불은 최영의 손녀사위다.

 

1. 고개를 숙이면 부딪치는 법이 없습니다.

열 아홉에 장원 급제하여 스무 살에 파주 군수가 된 맹사성은 자만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어느 날 그가 무명 선사를 찾아 물었다. 스님! 군수인 제가 삼아야 할 좌우명이 무엇이면 좋겠습니까? 그건 어렵지 않지요. 착한 일을 많이 베푸시면 됩니다. 그건 삼척동자도 다 아는 이치인데 고작 그것 뿐 이오?

 

맹사성은 거만하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러자 스님은 녹차나 한 잔 하고 가라며 붙잡았다. 그는 못이기는 척 자리에 앉았다. 스님은 그의 찻잔에 넘치도록 차를 따르고 있었다.

 

스님! 찻물이 넘쳐 방바닥을 망칩니다.’ 맹사성이 소리쳤다.

 

하지만 스님은 태연하게 계속 차를 따랐다. 그리고는 잔뜩 화가 난 맹사성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찻물이 넘쳐 방바닥을 적시는 것은 알고 지식이 넘쳐 인품을 망치는 것은 어찌 모르십니까? 스님의 이 한 마디에 맹사성은 부끄러워 황급히 일어나 방문을 열고 나왔다.

 

그러다가 문틀에 세게 부딪쳤다. 그러자 스님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고개를 숙이면 부딪치는 법이 없습니다.’

 

2. 비가 새는 초라한 집에서

 

맹사성은 효성이 지극하고 시와 문장에 뛰어났으며 음악을 좋아하고 마음이 어질고 너그러운 사람이었다. 그리고 오직 나라에서 주는 녹미(요즘의 월급)만으로 생활을 하는 청백리다 보니 집안이 찢어지게 가난했다. 그러나 맑고 깨끗한 그의 생활에는 한 점의 티도 없었다. 어느 비 오는 날 한 대감이 그의 집을 찾았다. 대감은 속으로 놀랐다 세상에! 한 나라의 정승이라는 사람이 이렇게 초라하게 살다니! 안으로 들어가서 맹정승을 만난 대감은 더욱 놀랐다. 여기저기서 빗물 새는 소리가 요란하고 맹정승 부부는 빗물이 떨어지는 곳에 그릇 갖다 놓기 바빴다.

 

대감은 그만 눈물이 핑 돌아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대감께서 어찌 이처럼 비가 새는 초라한 집에서 살고 있어 되겠습니까?

허허, 대감, 그런 말 마오. 이런 집조차 갖지 못한 백성이 얼마나 많은지 아오?

그런 사람들 생각을 하면 나라의 벼슬아치로서 나는 부끄럽소.

나는 그에 비하면 호강 아니오?‘

 

 

3. 맹사성의 흑기총(黑麒塚 검은 소 무덤)

 

햇살이 따사로운 어느 해 봄날 고불(古佛) 맹사성(孟思誠·13601438) 대감이 집 뒤 설화산 기슭을 오르던 중 어린 동자들에게 시달림을 받고 있는 큰 짐승을 발견했다. 장난기가 발동한 아이들은 짐승의 눈을 찌르고 배 위에 올라타면서 신나게 놀고 있었다.

멀리서 보니 짐승은 괴롭힘을 당하면서도 어쩐 일인지 꼼짝도 못했다.

평소 남의 일에 참견 않는 고불 맹사성이 호통을 쳤다.

 

이런 고얀 녀석들! 말 못하는 짐승을 돌보지 않고 못살게 굴어서야 되겠느냐. 썩 물러가지 못할까? 혼비백산한 아이들이 줄달음치고 난 다음 고불이 가까이 가보니 검은 소가 탈진해 있었다.얼른 집으로 가서 소죽을 쑤어다 먹이고 극진히 간호했다. 기운을 차린 검은 소가 꼬리를 치며 고불을 따라 왔다. 집에 데려와 정성껏 거두며 주인 잃은 소를 찾아 가라고 동네방네 소문냈지만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 후 고불은 이 소를 수족처럼 아끼며 한평생을 타고 다녔다. 세종 20(1438) 79세로 고불이 죽자 검은 소는 사흘을 먹지 않고 울부짖다가 죽었다.사람들이 감동하여 고불 묘아래 묻어 주고 흑기총(黑麒塚)이라 이름했다. 지금까지도 검은 소 무덤 흑기총은 고불 묘를 금초 할 때 빼놓지 않고 벌초하여 잘 보존되고 있다.

 

 

 

맹사성의 공당놀이

 

고불(古佛) 맹사성(孟思誠)은 황희(黃喜) 정승과 더불어 세종대왕의 치세를 도와 조선 왕조 초기에 문민정치의 기틀을 다진 명재상이요 청백리였다. 그는 벼슬이 정승에 올랐어도 청빈·검소하게 살았고, 음률에 정통한 음악의 달인이었으며, 자연의 이치에 순응하여 멋과 여유로 슬기롭게 살며 재미있는 일화를 많이 남긴 풍류 명사였다.

 

조선왕조 500년간 정승을 지낸 사람은 많지만 성이나 아호 뒤에 정승을 붙여 부르는 이는 대체로 네 명밖에 없다. 그 네 명은 맹 정승을 비롯하여 황 정승(황희), 상 정승 (상진), 오리 정승(이원익)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학식과 덕망이 빼어났고 구세제민의 경륜을 펼쳤다는 점, 모범적인 청백리라는 점, 그리고 민족 고유의 멋과 슬기인 풍류 정신으로 한평생을 보냈다는 사실 등이다.

 

맹 정승이 남긴 풍류 일화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는 높은 벼슬과는 어울리지 않게 평소 말이나 가마 대신 기린’, 또는 기리마라고 부른 검은 소를 즐겨 타고 다녔다.

 

어느 해 한식, 고불은 온양의 부모님 산소를 찾아 성묘하고 서울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그날도 여전히 기리마를 타고 어슬렁거리며 용인 땅을 지나는데 갑자기 봄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가늘던 빗발이 점점 굵어지더니 어느새 소나기로 변했다. 할 수 없이 주막으로 찾아들어가 비가 그치기를 기다렸다.

 

처마 밑에 기리마를 매어놓고 안으로 들어가니 젊은 선비 하나가 이미 아랫목에 자리 잡고 있었다. 본래 검소하여 좋은 옷을 입지 않았고 시골 노인처럼 아무렇게나 걸치고 다니던 차에 옷까지 비에 흠뻑 젖었기에 고불은 문가에 앉아 날이 개기를 기다렸다.

 

그러자 하인들을 거느리고 앉아 있던 아랫목의 젊은 선비가 심심했던지, “노인장, 이쪽 으로 오셔서 편히 앉으시지요.”하고 권하는 것이었다. 젊은 선비는 영남 사람으로 서울에 과거 시험 보러 가는 길이라고 했다.

 

두 사람은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는 동안 심심풀이삼아 장기를 두었는데 승부는 번번이 맹고불의 승리로 돌아갔다. 그러자 선비가 이번에는 묻고 대답하는 말끝에 자와 자를 달아서 누구의 말문이 먼저 막히는가 보기로 했다. 먼저 맹고불이 시작했다.

 

서울에는 무엇 하러 가는 공?”

녹사 시험 보러 간 당.”

내가 합격시켜 줄 공?”

에이, 놀리는 건 옳지 않 당.”

 

그러는 사이에 날이 개여 두 사람은 길을 떠나 서울로 올라와 헤어졌다. 그리고 며칠 뒤, 맹 정승이 공무를 보고 있는데 한 젊은이가 녹사 시험에 합격했다고 인사를 하러 왔다. 고개를 들어보니 며칠 전에 만난 그 선비였다.

 

맹 정승이 장난기가 발동하여 이렇게 물었다.

어떻게 되었는 공?”

그러자 젊은이는 자신이 인사하러 온 우의정이 바로 며칠 전에 만난 허름한 옷차림의 그 촌로인지라 깜짝 놀라 그 자리에 엎드려 대답하기를, “죽어 마땅하옵니 당!”했다고 하니 그 젊은이도 풍류의 멋을 아는 선비였던 모양이다.

 

어찌된 영문인가 의아해하는 사람들에게 맹 정승이 자초지종을 이야기해주자 모두가 배꼽이 빠져라 한바탕 웃음을 터뜨렸다.

 

고불 맹사성은 고려 공민왕 9(1360) 음력 717일 개경에서 맹희도와 흥양 조씨 부인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신창. 신창 맹씨의 시조는 맹자의 51세손으로 고려 희종 때에 문하시중을 지낸 맹리요, 고불은 그의 4세손이다.

 

맹사성은 고려조가 기울어가는 때에 어린 시절을 보내고, 우왕 12(1386) 27세 때 과거에 장원 급제하여 춘추관검열로 벼슬길에 올라 이후 33세까지 여러 하급 관직을 맡았는데, 그 사이에 큰 정변이 일어났다.

 

 

1388년에 야심만만하던 이성계(李成桂)가 위화도회군을 감행하여 임금을 마음대로 갈아 치우고 최영(崔瑩정몽주(鄭夢周) 등 충신들을 잇달아 숙청한 뒤 1392년 마침내 역성혁명을 일으켜 조선왕조를 개국하고 태조로 등극한 것이었다.

 

이 태조가 한양으로 천도하고 새 나라의 기틀이 잡히기 시작하자 맹희도는 아들에게 출사하여 백성을 위해 일하도록 권했다. 그렇게 하여 새 정부의 벼슬살이를 시작한 맹사성은 태종 6(1406) 8월에는 정3품 당상관인 이조참의에 등용되었다. 그러나 벼슬길이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었다. 황희도 마찬가지였지만 이른바 혁명주체가 아니라는 이유로 태조와 태종의 측근으로부터 끊임없이 견제와 질시를 받았고, 특히 청렴강직한 성품대로 공무를 집행했다가 괘씸죄에 걸려 죽을 뻔하거나 쫓겨나기도 했다.

 

1419년 태종이 세종에게 양위하고 상왕으로 물러나 앉았다. 고불은 세종의 조정에서 이조판서로 입각하여 68세가 되던 세종 9(1427)에 마침내 우의정으로 승진했다. 은 날 황희는 좌의정에 임명되었다. 이어서 세종 13(1431) 9월 황희는 영의정으로, 맹사성은 좌의정으로, 허조는 우의정으로 승진하여 세 사람은 힘을 합쳐 세종의 치세를 뒷받침했다.

 

고불은 풍류객답게 가끔 틈을 내 낚시도 즐겼다. 어느 날 온양에 내려갔다가 머리를 식힐 겸 가까운 세교리의 저수지에서 낚시를 하다가 그 마을에 사는 전 첨지라는 노인을 만났다. 낚시를 좋아하는 두 사람은 곧 통성명을 했는데, 고불은 자신이 중리에 사는 맹 첨지라고 했다. 나란히 앉아 낚시를 즐기다가 두 사람은 고불이 싸가지고 온 보리개떡을 점심으로 나누어 먹었다. 날이 저물어 헤어지면서 고불은 아무 달 아무 날이 내 생일인데 별로 먹을 것은 없겠지만 놀러오라고 청했다. 그런데 전 첨지는 가난한 농부였으므로 맹 첨지의 생일이 오자 고민이 되었다. 생일잔치에 초대받았는데 마땅한 선물이 없었던 것이다. 생각하다 못해 맹 첨지가 좋아하는 보리개떡을 만들어 싸들고 중리로 찾아가 사람들에게 맹 첨지 댁이 어디냐고 물었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노릇인가. 맹 첨지의 집은 예상과는 달리 보잘 것 없는 초가가 아니라 커다란 기와집인데, 그 앞에 여러 채의 수레와 가마와 여러 마리의 말이 늘어서 있는 것이었다. 전갈을 받은 고불이 버선발로 달려나와 반갑게 맞아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그리고 생일을 축하하러 온 고관들에게 낚시친구 전 첨지를 소개했다. 그때서야 낚시터에서 만난 맹 첨지가 바로 유명한 맹 정승이라는 사실을 알고

전 첨지가 전날의 무례를 백배사죄했다. 그러자 고불이 말했다.

 

이보오, 전 첨지.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는 법이오.

내 비록 벼슬이 정승이라고는 하나 만백성이 내 벗이 아니겠소?

그러니 사죄니 뭐니 하는 말은 말고 앞으로도 자주 함께 낚시를 즐깁시다.”

 

이처럼 소탈하고 청빈 무욕한 고불인지라 벼슬이 정승이라도 집안은 늘 가난했다. 세종 17(1435) 노령을 사유로 벼슬길에서 물러난 맹사성은 조용히 만년의 풍류를 즐기다가 3년 뒤인 세종 20년에 향년 7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맹사성의 묘는 경기도 광주시 직리 야산 기슭에 있다

 

초야와 동상례

결혼식을 요즘은 화려한 예식장에서 현대식으로 식을 올리지만 옛날에는 전례로 내려오는 풍속에 따라 결혼식을 신부 집이나 신랑 집에서 혼례를 올렸다.

혼례식 후 신부가 친정에서 묵히고 신행을 가는 경우에는 초야를 신부 집에서 보내지만 혼례식 당일 신행하여 시댁에서 초야를 보내는 경우도 있다. 혼례가 끝나면 간편하게 한복을 입고 상객을 모신 후 상객이 모두 돌아가고 나서 저녁이 되면 다시 혼례복을 입고 첫날밤을 보낼 준비를 한다. 초야(첫날 밤)를 보내는 곳은 큰 방으로 신혼부부를 위해 부모가 자는 방을 내주는 것이다. 방안 윗목에서 술과 과일 등을 올린 상을 두는데 신랑이 가져다가 신부와 함께 먹는다.

혼례복은 술을 먹기 전에 벗기도 하고, 잠자리에 들기 전에 벗기도 하는데 신랑이 신부의 옷을 벗겨 줄때는 족두리만 벗겨주는 경우도 있고 원삼까지 벗겨주기도 한다. 그러면 신부가 속적삼만 남기고 전부 벗는다. 신부는 초야에 속적삼을 입고 자는데 이는 속 시원하게 살리는 의미라고 한다.

첫날밤은 관계를 갖지 않으며 초야를 보낼 때는 사람들이 문에 구멍을 뚫어서 신혼 방을 훔쳐보며 야단법석이다. 초야를 보낸 후에는 다음날 바로 신부의 방이나 신혼 방으로 옮기기도 하고 삼일 때 되는 날 옮기는 경우도 있다.

당일 신행하는 경우에는 시댁이라는 장소만 바뀔 뿐 다른 행동은 동일하게 한다.

결혼 초야를 지낸 다음에는 한잔하며 즐길 수 있는 동상례가 준비되어 있다. 초야를 치룬 다음날 처가 친척의 사람들과 청년들이 신랑을 데려다 발을 묶어 매단다. 이 때 청년들은 신부의 부친에게 술이나 먹을 것을 내오라고 요구하는데, 그것을 들어 주어야만 신랑을 내려 주었다.

어느 가정이건 젊은 청년들이 신랑을 묶어 놓고 발바닥을 때린다든지 하면 신부나 신부 부친이 나서서 사위가 다칠세라 청년들의 요구를 다 들어준다. 그러면 동상례에 참석한 모든 분들은 음식을 장만하여 모두 함께 음식을 들며 정담을 나누고 신랑신부가 일생을 살아가는데 좌우명이 될 수 있는 선배들의 조언이 막 쏟아져 나온다.

신부의 집에서 초야를 보내지 않고 바로 신행한 경우에는 재행을 했을 때 다루기를 한다.

지역마다 그 동상례의 전례풍속은 약간 달라도 거의 비슷한 전례에 의해 동상례를 치르게 된다. 동상례에 얽힌 내용들을 간추려보면 어느 귀염둥이로 자란 외아들이 장가를 들어 동상례를 하게 되었는데 청년들이 실겅에 매달고 발바닥을 몇 대 때렸는데 엄살이 어떻게 심하여 풀어 주었는데 화장실 간다고 방문을 열고 자기 집을 줄행랑을 쳐 버려서 신부 집에서는 신랑이 행방불명이 되었다고 횃불을 들고 온 마을을 다 찾아 봤어도 찾을 길이 없어 젊은이들이 몇몇이 신랑 집으로 찾아 갔더니 방문을 잠그고 숨어 있었다는 일화도 있다.

그래서 도망 나온 신랑은 평생 처갓집 다닐 때 고개를 푹 숙이고 자기의 연약한 행동을 반성하게 되었다고 하며 동상례에서 줄행랑 쳤다는 말이 평생 따라 다녔다고 한다.

이젠 그 아름다운 초야의 밤도 흥겹고 즐거웠던 우리 조상들의 고풍스런 동상례를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옛 풍습으로 남게 되어 오늘의 젊은 그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전례 풍속이기에 우리 아버지, 어머니는 이러한 풍속 속에서 사시면서 우리를 키웠구나 하고 생각해 보았으면 하는 바람으로 기록해 둔다.

*참고자료 : 한국인의 일상의례